고등학교 축구부 학부모 술자리 규율
한 고등학교 축구부 학부모들의 "술자리 규율 지침서"란 어처구니없는 문서가 흘러나왔습니다. 읽어 보면 십중팔구 감독은 악마, 저걸 당하고 있는 학부모는 한심하고, 답답하고, 병신같이 느껴질 겁니다. 감독에게 잘 보여야 경기 출전도 하고, 성적도 만들고, 상급학교도 진학하는 학부모들의 처지가 느껴져 마음이 아플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학부모가 지도자를 존중해야 애들도 존중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왜 학부모들 사이에 군기가 필요할까요. 아무리 운동부가 맛탱이 갔어도 저런 얼탱이 없는 규율이 뭣 때문에 존재할까요. 나는 그 이유가 감독의 권위에 부정한 방식으로 편승하고 누군가의 입은 틀어막아야 하는 학모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인가요.
고등학교 축구 감독의 역할은 좋은 선수를 많이 육성하는 겁니다. 그래야 선수들이 고교 졸업 후 드래프트에 참여해 프로무대에 진출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게 안 되는 경우 대학입학이라는 성과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졸업생 00 명 가운데 00 명을 대학에 보냈다.” 이게 고교 축구 감독의 성적이고 평판을 좌우합니다. 문제는 3학년 실력 없는 애들입니다. 실력 없으면 도태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능력있는 감독님 눈에 잘 들기만 하면 실력 없어도 경기 성적을 만들고 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원되는 게 이른바 밀어주기 담합 즉 "짬짜미 승부조작"입니다. 실력이 안 되는 3학년 선수를 감독이 경기출전 시키고, 다른 팀 감독과 학부형들까지 동원해 성적을 만들어 줍니다. 이쪽 팀의 학부형들과 감독 그리고 상대팀 감독과 학부형들이 서로 담합해서 서로서로 승부를 밀어주고 경기실적을 만드는 조직적인 입시비리입니다. 신문을 검색해보면 끊임없이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런데 이 같은 짬짜미가 신문에 나는 건 학부모들이 목숨 걸고 항의하기 때문입니다. 동조가 못 이루어 졌다는 얘기죠. 이번 대회에서는 내가 이기고 다음 대회에서는 니가 이기면 너도나도 윈윈인데, 꼭 올해가 아니어도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이런 짬짜미가 있어야 안정적으로 학생은 대학가고 감독은 성적내고 고교축구 명문은 유지되는 것인데, 그걸 못 참고 항의를 하는 겁니다. 군기는 이런 부적응자들을 위한 체계입니다.
저기 술자리 규율 강령에 보면 학부형 간 나이 순도 아니고 학년에 따른 위계서열을 만들고 있는 게 눈에 띕니다.
- 술자리 장소가 정해지면 신입생 부모들은 먼저 장소로 가서 대기한다.
- 감독이나 선배부모보다 늦게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금한다.
- 3학년 학부모들과 감독의 자리배정을 먼저하고 그 다음 2학년 1학년 순으로 앉아라.
1학년 학부모는 쫄따구, 3학년 학부모는 하늘입니다. 학부모 간 학년을 기준으로 위계서열 관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짬짜미 입시비리 프로세스에서 가장 문제되는 건 실력 있는 저학년 학부모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손흥민이 입학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감독이 애를 벤치에만 쳐박아 논다고 생각해 보세요. 부모가 가만있겠습니까. “우리 새끼 잘 하는데 왜 안 뛰키냐. 이 개새끼들아 이거 다 조작 아니냐~~~” 조심스럽게 만들어 가는 판대기에서 개소리가 튀어 나올 수 있겠죠. 학년 간 위계를 만들어야 감독님 하시는 거룩한 일에 입바른 소리를 차단하고 “순서를 지켜라”라는 무의식을 주입 할 수 있겠죠. 학부모 술자리 규율 강령을 통해 “이 양반아 이 바닥에도 위계가 있어. 우리 감독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어. 하늘 같이 모셔야 당신 자식 앞길도 열리는 거야?”란 암묵적 압박이 가해지는 겁니다.뭐 다들 좋은 게 좋은 거라 동조하면 쉽겠지만 그게 잘 안되면 규율 같은 걸 동원해서라도 주눅들게 만드는 일종의 집단 최면 같은 역할을 하는거죠. 저런 규율을 운영하는 학교를 추적해 보면 짬짜미 승부조작을 벌일 확률이 무척 매우 엄청 높다는 게 내 주장 입니다.
물론 모든 고교축구에 저런 학부모 규율이 있고, 짬짜미 입시비리를 저지른다고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 고교축구 학부모 술자리 규율을 짬짜미 입시조작의 프로세스 과정에서 동조라는 집단의식을 형성하기 위한 의례라고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저런 관행이 절망적이라는 의견이 많던데, 정확하게 어떤 게 절망적입니까. 악마 같은 감독의 횡포에 저런 병신 같은 학부형들이 동조하고 있는 게 절망적입니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감독이 절대권한을 갖을 수 밖에 없는 부패한 학교 중심의 선수육성 시스템의 문제로 확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축구선수가 감독 코치 월급 포함해 한 달에 드는 비용이 150만 원 가량이라고 합니다. 돈 들이고, 이런 얼척없는 꼴까지 당하면서 자식새끼 축구선수 만들어야 하는 한국의 축구선수 학부모는 그야말로 극한직업의 최전선입니다. 그리고 고교축구 학부모 술자리 규율은 학교를 기반으로 한 축구선수 육성시스템이 막장까지 가버려서 학교에서는 정상적인 엘리트 선수를 키울 수 없다는 절망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학교체육을 개혁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고 나는 축구 야구와 같은 시장이 빵빵한 종목의 경우 엘리트 선수를 육성하기에 학교가 절대 적합하지 않다라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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