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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승백

고의 패배(tanking): 도덕과 실리의 아노미

최종 수정일: 2022년 1월 10일

2019년 3월 8일 남자배구 V리그 마지막 6라운드 경기, 당시 OK저축은행(현 OK금융그룹)은 KB손해보험과 승점은 같지만, 다행히 다승에서 뒤져 리그 최하위를 달리고 있었다. 잔여 경기로 KB손해보험은 한 경기, OK저축은행은 두 경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OK저축은행의 안정적 꼴찌를 위해선 두 경기 모두에서의 패배가 절실했다. 그리고 얼마 전, 해당 경기에서 OK저축은행 구단 고위 관계자가 단장에게 고의 패배를 지시한 구체적 정황이 밝혀졌다......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우승이 아니라 꼴찌를 하기 위해 패배가 절실한 상황이고, 구단 고위 관계자는 고의 패배를 지시했다니. 이유는 꼴찌를 해야 다음 시즌 드래프트에서 구슬뽑기로 결정하는 1순위에 대한 확률을 높일 수 있고, 외국인 선수 선발제도(tryout)에서 우선순위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포츠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의도적, 전략적으로 패배를 선택하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는데 이를 일컬어 ‘tanking’이라고 한다. 본 고에서는 스포츠에서의 최선이 오히려 실이 되는 경우 일어나는 ‘고의 패배’에 대해 tanking이란 개념을 통해 살펴본다.

패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

2012년 런던 올림픽, 배드민턴 조별 예선에 나선 선수들은 이상한 장면을 연출했다. 시종일관 서비스를 네트에 꽂거나 일부러 스매싱을 멀리 내보내 버렸다. 그리고 경기 후, 세계배드민턴연맹(BWF)은 패배를 위해 최선을 다한 한국 선수 4명, 중국 선수 2명, 인도네시아 선수 2명, 총 8명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경기에 나서는 행위' 그리고 ‘스포츠 정신을 훼손하는 행동'을 금지하는 배드민턴연맹 규정을 적용해 실격처분했다. 선수들에게는 비난이 쏟아졌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훼손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 망신이자, 승부조작을 했다는 것이었다.

2012-2013 프로농구에선 6강 플레이오프를 탈락한 팀들이 노골적인 패배를 거듭하며 앞다퉈서 아래로의 순위경쟁을 펼쳤다. KBL은 ‘강력한 징계를 내릴 수 있다’는 공문을 돌렸지만, 최선을 다했는지, 약간 힘을 뺐는지, 고의로 패배했는지 그 경계를 구분하기란 참으로 모호하지 않은가. 차라리 조금이라도 저조한 성적을 거둬 다음 시즌 신인드래프트에 참여하는 김종규 등 차세대 유망주를 선택하는 게 백번 유리하다 판단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승리하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 아닌 손해가 나는 경우 우리는 손해를 감수하고 최선을 다해야 할까. 아니면 눈 딱 감고 실리를 선택해야 할까. 스포츠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윤리(문화적 목표)와, 패배를 선택해 드래프트(제도적 수단)같은 상황에서 유리한 조건을 잡는 실리가 공존한다. 머튼(Rober K. Merton)은 이와 같은 문화적 목표와 제도적 수단의 불일치 상태를 아노미(anomie)라고 불렀다. 문제는 이 아노미 상태에 놓인 개인이 끊임없이 가치관의 혼돈과 갈등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꼴찌는 절대 안 돼! 목숨을 걸고 뛰는 선수들?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축구 경기는 무엇일까. 한일전? 월드컵이나 올림픽 결승전? 아니면 엘클라시코 같은 더비 경기? 나는 시즌 막판 하위 리그 강등을 면하기 위한 경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치열함은 리그 잔류에 주어지는 이해(利害)의 양에 비례할 것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보자. 2019-2020년을 기준으로 볼 때, 프리미어리그 각 팀에 중계권료를 비롯하여 광고료를 포함해 지급되는 인센티브 총액의 합은 대략 3조 7천억 원(2,456,008,346파운드)이다. 이 가운데 중계권료의 50%는 모든 구단에 공평하게 분배하는데 이 돈이 약 1,150억 원(국내 3436만 파운드 + 국외 4318만 파운드), 여기에 중계 횟수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금액 25%(facility fees), 순위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금액 25%(merit payment), 일괄적으로 균등하게 지급되는 광고료 약 70억 원 등을 합하면 그 액수가 무려 1,500억 원이 훌쩍 넘는다. 그러니까 프리미어리그에 잔류만 하면 최소한 1,500억 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마지막 라운드 17위와 18위의 순위 싸움과 관련된 경기는 구단의 측면에서 보면 1,500억이 걸린 숙명의 단판 승부이자 피터지는 전쟁일 수밖에 없다.

위의 상반된 두 가지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선수들이 리그 진행 방식에 따라 고의 패배를 선택하기도 하고 목숨 걸고 뛰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고의 패배는 단순히 개인 윤리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제도적 세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수, 감독, 구단을 아노미 상태에 빠뜨리는 제도들

스포츠라면 승리를 통해 성취를 누리는 게 당연지사이고, 팬들이 최선을 다하는 선수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다. 이 점을 생각하면 tanking을 벌이는 구단과 선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승리하는 것이 이득이 아닌 손해이고, 오히려 패배가 더 이득인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아노미의 갈등상태에 놓이기 마련이다. 이 경우 개인의 도덕관념만 탓할 게 아니라 제도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경고음이란 점을 상기해야 한다. 2012년 tanking을 벌인 선수들에 대해 언론은 도덕성을 문제 삼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인센티브가 제도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배드민턴의 경기 진행은 ‘빈약한 경기 운영(poor rules)”이란 비판을 면치 못했다. 이를 계기로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어느 그룹이든 조별 예선에서 2위로 마친 팀은 다음 라운드에서 마주할 팀을 결정하기 위해 추첨 경기를 진행하게 하는 방식으로 규정이 개선되었다. 배구와 농구의 시즌 막판 고의 패배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자금력이 뛰어난 구단이 유망선수를 독점, 리그의 경쟁균형을 유지, 지나친 선수 선발 비용경쟁을 막아준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시즌 막판 고의 패배의 유인요인을 제공한다면 도덕적 훈계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적 제도를 모색해야 한다. 가령 드래프트 우선권을 단일 시즌 성적이 아닌 3년 평균 성적에 따라 결정한다면 어떤가. 어차피 하위권 팀들의 경쟁인 만큼 마지막 라운드 성적을 제외하는 건 또 어떤가. 얼마든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선수들은 개인의 기량과 성취로 평가받는 노동자이자 개인사업자들이다. 구단의 이익을 위해 이들에게 고의 패배를 종용하는 건 선수들의 노동권 침해이자 영업방해이다. 팀은 이익을 보겠지만 명예가 실추된 올림픽 참가 선수와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 못 한 프로선수의 손실은 누가 책임을 지나. 그뿐만이 아니다. 해당 경기에 합법적이고도 공식적인 체육진흥투표권 사업에 투표하여 국민체육진흥기금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스포츠 베팅 참여자들의 공정한 경기분석을 계획적으로 방해하는 행위이다. 고의 패배는 스포츠 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란 점을 상기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성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ㅜ


서울스포츠 2020년 12월호 No. 362 스포츠 잡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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