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 Seungbaek Blog

축구협회를 둘러싼 분노의 말 잔치가 무성하다. 뿌리부터 썩었다. 싹 다 갈아엎어야 한다. 카르텔을 파헤쳐야 한다. 고려대라는 학맥, 현대家가 독점한 회장 체제, 절차적 정당성을 잃은 감독 선임, 그리고 이번 북중미 월드컵의 참담한 결과까지 하나의 선으로 묶인다.
정치권은 이런 판을 놓치지 않는다. 청문회에 불려 나온 재벌 회장 망신주기, 결코 고개 숙이지 않을 홍명보, 국민을 대변한답시고 호통치는 의원들. 정치는 이 익숙한 장면을 연출하고, 언론은 자극을 재생산하며, 국민은 쾌감을 소비한다.
망신주기의 스펙터클은 개혁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임자를 세우고 분노를 배출한다고 해서 왜 축구협회가 이런 방식으로 움직여 왔는지, 선명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축구협회 안에 비공식적 결탁구조가 구축되어 있다면, 그 힘은 어쨌든 제도의 틀 안에서 나온다. 감독 선임의 기준이 흐릿하고, 회의 기록이 남지 않고, 권한을 부여받은 위원회의 역할이 모호할 때 사적 네트워크가 의사결정을 대신한다. 인맥과 출신 학교가 그 자체로 권력이 되는 게 아니라, 느슨한 규정이 특정 집단의 권력 독점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K-축구 혁신위원회’가 출범 예정이다. 문체부 장관과 박지성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대한체육회장 유승민, 이영표, 박주호 등이 이름을 올렸다. 북중미 월드컵의 실패와 대중의 분노가 정부 주도의 한시적 기구를 불러냈다. 그러나 혁신위원회는 점령군이 아니다. 장관이 있고, 체육회장이 있고, 박지성이 있다고 대한축구협회의 정관과 규정을 마음대로 뜯어 고칠 수 없다. 정부가 협회를 직접 손보는 순간 FIFA의 제3자 개입 금지 원칙과 충돌하고, 그 대가는 앞서 본 대로 한국 축구 전체가 치른다.
그래서 정관을 바꾸고, 회장선거관리규정을 고치고, 감독 선임 절차를 손보려면 결국 협회 내부의 공식 의사결정 절차 즉 이사회를 거쳐야 한다. 정관 개정은 총회 몫이지만, 개정안을 제의하고 총회에 올리는 것도 이사회의 몫이다. 회장선거관리규정은 총회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사회가 의결하고 대한체육회 승인을 받으면 된다.
나는 그동안 이사회가 회장 권력을 견제하고 책임졌는지 모르겠다. 정관상 부회장과 이사는 회장이 추천한 사람 중에서 선임되고, 총회는 그 선임 권한마저 회장에게 위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비공개가 원칙이고, 의사록은 차기 이사회에 보고하면 그만이다. 이런 이사회가 회장과 집행부의 판단을 추인하는 자리였는지, 한국 축구의 방향을 놓고 책임 있게 논의하는 자리였는지 따져야 한다. 이런 디테일을 그냥두고 넘어가면 혁신은 요원할 뿐이다.
혁신위원회는 협회를 대신해 결정할 수 없다. 다만 대중 여론이라는 당위를 등에 업고 이사회가 외면하기 어려운 안건을 만들 수는 있다. 경로는 이미 정관에 나와 있다. 선거인단의 직군별 배정을 넓히는 회장선거관리규정 개정안은 이사회 의결과 대한체육회 승인만으로 시행된다. 전력강화위원회에 감독 선임의 실질 권한과 기록 의무를 부여하는 규정 정비도 같은 경로다. 선거인단 규모의 상한을 늘리는 일은 정관 개정 사항이라 총회까지 가야 하지만, 그 안건을 총회에 올리는 관문 역시 이사회다. 혁신위원회가 내놓아야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문서이고, 구호가 아니라 의결 가능한 안건인 것이다. 안건이 구체적일수록 이사회는 피할 곳이 없어진다.
축구협회 개혁은 분노의 한풀이로 만들어질 수 없다. 청문회장의 호통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다. 회장 선거는 더 넓은 대표성 위에서 치러져야 하고, 감독 선임은 공개 가능한 기준과 절차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전력강화위원회와 이사회는 공식적 논의의 기록을 남기고 책임을 져야 한다.
대한축구협회는 FIFA 회원협회이고, 사단법인이다. 외부가 대신 결정하는 순간 한국 축구는 대가를 치르고, 내부 절차를 건너뛴 개혁은 제도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혁신위원회의 역할은 이사회가 외면하기 어려운 안건을 제언하는 일이다. 한국 축구에 필요한 것은 악인 색출의 서사가 아니라, 누가 와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제도다.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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